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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일본의 외교 (3) : 개항과 막부의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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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웅
2023-10-12 19:33 72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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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개항 직후의 일본 대외정책의 목표

  러일전쟁 전의 일본 외교에는 큰 목표가 2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불평등 조약의 개정이었고, 둘째는 한반도에서의 지배적인 지위의 확보였다. 이런 점에서 근대 개항 직후의 일본의 외교 정책에는 일관성이 있다고 평가 할 수 있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 때부터 메이지 유신 초기에 이르기까지 황위라는 단어는 일본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또한 황위발양1).은 일본 외교의 원칙인 것처럼 여겨졌다.

  이러한 일본의 인식에는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독립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되었다. 국제 평등의 입장에 서서 배외주의를 버림과 동시에 일본은 한 국가로서의 존재를 유지한다. 여기서 한 국가의 존재는 바로 황국의 독립을 보호하는 것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불평등조약의 개정은 명치 정부 초기부터 일본의 대외정책의 최우선의 목표였던 부분이 이해될 수 있다.

  문제는 그렇다면 일본의 자주독립국으로써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었는가에 달려있다. 도쿠가와 막부 막기를 돌이켜 볼 때 일본은 서양 국가들의 군사력이 일본과 현격한 차이를 갖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군비를 충실히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일본의 지도자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일본의 지도자들은 단순히 군사력을 강화할 방안은 찾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부강한 국가들 만드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보았다. 결국 일본의 지도자들이 내린 결론은 서구 국가들의 힘은 정치적, 경제적 근대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치적으로는 민중의 에너지를 모으고, 교육을 통해 국가의식을 고양하는 한편, 경제적으로는 산업을 발전시켜 국부를 쌓아 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책들은 국내 정책으로 일본의 외교와는 직접적으로 연관성을 갖지는 않았다. 그러나 불평등조약이 유지되는 한 일본이 정치적, 경제적 근대화를 이루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관세 자주권이 없었기 때문에 수입품은 저율의 관세로, 수출품은 외국 상인들을 거쳐서만 수출될 수 있었다. 또한 치외법권으로 인해 외국 상인들은 일본 법률의 밖에서 활동하였고, 그 결과 일본의 무역이 이들에게 크게 좌지우지 되었다.

  따라서 조약 개정은 단순히 일본의 굴욕적인 조약을 철폐하고 국가적 자존심을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국력의 기초로서 경제력을 증진시키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6. 국내 경제의 파탄과 막부 체제의 붕괴

  개항 직후 일본의 국내 경제를 뒤흔든 것은 바로 금은 교환 무역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세계의 금은교환비율의 약 3분의 1의 정도의 은으로 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즉 세계 평균 은 3덩이에 금 1덩이를 교환할 수 있었다면, 일본에서는 은 1덩이에 금1덩이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개항 직후 서구의 국제무역상들은 막대한 양의 금을 일본에서 사들였고, 이를 다시 중국에 판매함으로써 막대한 차익을 남겼다.

  문제는 막부가 이에 대응하기 위해 금화의 질을 떨어뜨려 금의 국제가격을 인상하면서 발생했다. 그 결과 통화 공급이 시장에 막대하게 늘어났고 이는 인플레이션으로 연결되었다. 동시에 생사(生絲)의 수출과 수요가 급증하였고, 1860년에 생사 가격이 3배 이상 급등하게 되었다. 문제는 원자재의 가격이 급등한데에 반해서 낮은 가격의 서구의 일반 소비재와 면직물의 수입이 증대되면서 일본의 면직물 생산자들의 다수가 경제적 위기를 겪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 정세의 격변과 동시에 도시는 쌀값이 폭등하게 되었다. 1966년에 이르러서는 인플레이션이 절정에 달했고, 그 결과 오사카와 에도에서는 대규모 식량폭동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식량폭동의 결과로 미곡상 수백 군데가 파괴되었다. 이러한 폭동은 일본 전역 곳곳에서 일어났고 결국 막부가 군대를 동원해서야 진정 되었다.

  1853년 막부의 수석 로주(老中, 정무통감) 아베 마사히로는 페리의 첫 내항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하여 다이묘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그 결과 서양에 대한 개국에 필적하는 국내적인 개국을 결정했ㅆ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막부의 약점을 드러내는 등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사쓰마, 조슈, 도사를 비롯한 도쿠가와가의 권력에 대항했던 웅번들이 정치적 야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도쿠가와 가문이 권력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200년 간 반 도쿠가와 의식을 가져왔다. 이들은 막부, 다이묘, 궁정 사이의 역학관계 변경을 강력히 요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들은 양이론과 존왕론을 주도하여 일본 내의 사상적 조류를 주도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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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위발양이란 황국을 세계 제1의 강국으로 건설하고 황위를 해외에 떨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일본 제국을 강국으로 건설하고 천황의 위엄을 알리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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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이오키베 마코토, 조양욱 역, <일본외교 어제와 오늘>, 서울: 다락원, 2002.
이리에 아키라(入江昭), 이성환 역, <일본의 외교>, 서울: 푸른산, 2001.
앤드류 고든(Andrew Gordon), 김우영, 문현숙 역, <현대 일본의 역사 1>, 서울: 이산, 2015.
앤드류 고든(Andrew Gordon), 김우영, 문현숙 역, <현대 일본의 역사 2>, 서울: 이산,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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